혜화국민학교
여덟살이 되면서 학교에 들어갔다.
형과 누나가 학교에 가면 조용한 집에 혼자 남아 뒹굴며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하던 나도 학교에 갈 때가 된것이다.
유치원은 부자집 아이들이나 다니던 시절이었으므로 우리집이 부자가 아니라는 것을 일찍 깨우친 나는 일곱살이 되었을 때 유치원을 보내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다섯 명의 형과 누나 아무도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음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 이었을 것이다.
형과 누나들은 모두 성북국민학교를 졸업했거나 다니고 있었다. 물론 우리집이 성북동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나를 혜화국민학교에 입학시켰다. 어머니가 막내 아들인 나를 굳이 학군을 위반해가며 옆동네의 학교에 보낸 것은 혜화국민학교가 서울에서도 몇손가락 안에 꼽는 중학교 진학의 명문 이었기 때문 이었으리라.
그리고 사실 우리집에서의 거리가 성북국민학교보다 더 가까웠던 점도 고려하셨을 거라고 믿는다.
소심한 나는 입학 부터가 규정에 위반된 것임을 눈치 챘을 때부터 매일매일이 불안 하였다. 주변에 같은 상황에 처한 아이가 여럿 있었으나 유독 정해진 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마음의 평안이 깨지며 불편해하는 나의 성격탓에 어머니에게 짜증을 내며 전학을 요구했지만 여덟살의 내가 어머니의 굳건한 의지를 꺽는다는 것은 당연히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신설동에 사는 이모집의 나와 동갑내기 이종사촌이 버스와 전차를 갈아타며 다니겠다고 혜화국민학교에 입학했으니 나로서는 더이상 떼를 쓸 명분이 없었다.
학년이 바뀌어 가정환경조사서를 제출하거나 선생님의 가정방문이 실시될 때는 우리집 주소가 공식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특히 스트레스가 심해졌으며 평소에도 마치 표 안사고 극장에 숨어 들어온 아이처럼 언제 쫒겨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학교생활을 하였다.
차라리 빨리 쫒겨가서 남은 학년이라도 편하게 다니고 싶다는 생각도 여러번 하였는데 학교에서는 이따금씩 지적하기만 할 뿐 무슨 이유인지 결정적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대상이 너무 많았기 때문 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 이지만 그 때도 부모님들의 뜨거운 교육열은 오직 상급학교 진학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어떻게든 명문중학교 진학율이 높은 곳으로 아이를 보내려 하였다.
너도나도 입시 실적이 좋은 몇몇 학교로 아이들을 보내려고 몰리다보니 학교에서 감당하기 힘든 정도로 학생수가 증가 되어 크게 사회문제가 되고 있을 때였다.
한 반의 학생수가 백명을 넘나드니 학년이 끝날 때까지도 선생님이 아이들 이름을 다 알지 못하고 지나는 것이 예사였고 학년당 스무 반이 넘게 있으니 학년이 바뀌면 같은 반에 아는 아이가 대여섯 밖에 안되는 경우가 다반사 였다. 그러다보니 여러 해를 다녀도 서로 같은 학교를 다니는지 알기 힘들었다.
전교생이 만명이 넘으니 손바닥 만한 운동장에서는 모두모여 조회를 할 수도 없었으며, 교실이 모자라 저학년은 3부제 수업을 해야했고 그래서 오전반 오후반에 더해 저녁반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그래도 혜화국민학교를 비롯하여 교동, 재동, 효제, 수송 등 소위 특A 7개 국민학교는 부모님들에게 여전히 인기가 있었다.
그런데 5학년이 되는 해인 1969년부터 서울의 중학교 입학이 무시험 추첨제로 바뀌어서 모든 중학교가 평준화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동안 콩나물시루로 비유되던 과밀학급에서 삐대며 보낸 시간은 중학교 선택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원망하거나 뭐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때로는 전교생이 모두 알고 지내는 작은 시골학교에서 '아이러브스쿨'의 분위기를 한 껏 느껴가며 같이 자란 친구들이 하는 동창모임을 구경할 때면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을 감출수 없다.
5학년 가을, 우리집이 합정동으로 이사하여 전학할 때까지 혜화국민학교를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