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의 기억

입영열차

센티멘탈 쟈니 2020. 8. 7. 11:20

1980년 5월, 세상이 한참 혼란했던 시절 나는 대학 3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가기 위해 휴학계를 내놓고 대기중 이었다. 할 일 없이 빈둥거리며 친구들과 여름에 어디로 바캉스를 갈까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온 5월 30일 금요일 저녁, 어머니가 입대영장이 나왔다며 전해주셨다. 
 
입대영장은 보통은 2~3달 짧아도 1달의 여유는 두고 발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아마도 여름을 지나서 입대하게 되나보다' 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웬걸, 영장을 보니 입대일이 6월 2일로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멍~해지기도 하고, 뭔가 잘못 되었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몇 번을 다시 보아도 3일후의 날자가 확실 하였다. 어머니에 의하면 영장을 들고온 봉천4동(현, 낙성대동) 방위병이 날자가 긴급하니 본인에게 바로 전달되어야 한다고 특별히 강조하였다고 한다.
       
준비안된 상태에 훅- 하고 들어온 펀치를 맞은듯 하여 혼란스러웠으나 '침착하자'하고 나자신을 달래면서 남은 시간과 해야할 일들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오늘은 이미 저물었으니 남은 시간은 내일과 모레 이틀뿐인데 인사 다닐 곳과 보고갈 친구들이 많은데 어떻게 해야하나? 고심끝에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서 바쁘게 다니기로 하고 연락이 필요한 곳에 전화를 돌리기 시작하였다.

주말 이틀 동안 부지런히 움직여 숙부님 두분과, 분가한 형님과 누님들 그리고 웬지 꼭 인사드리고 가야할 것 같아서 시외버스를 타고 화성군에 있는 할아버지의 산소에 까지 다녀왔다. 할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명절 때 성묘를 다녀온 것 외에는 특별한 기억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무엇 때문인지 그냥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소에 술 한잔 따라 드리며 '무사히 다녀오게 도와주세요'하고 부탁을 드렸는데 그러고 나니 마치 해야할 의무를 마친것 처럼 한층 마음이 가벼워지고 은근히 보호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도 갖게 되었다.    

촉박한 시간으로 연락이 많이 되지는 않았지만 대학 선후배와 친구들이 환송회를 열어주어서 고맙게도 작별인사를 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나에겐 죽마고우라 할 수 있는 중학교 동창 그룹과도 짬을 내어 잠시 어울릴 수 있었다. 그리고 둘째날 저녁에는 늘 다니던 동네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음으로서 입대준비를 마무리 하였다.

 

 

잘려진 머리카락 덩어리들이 이발보자기 위로 뭉텅뭉텅 떨어지는 것이 거울 속에서 보일 때 처음으로 삭발을 했던 중학교 입학 전날이 데자뷰와 같이 떠올랐다. 정확히 9년3개월 전에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있었는데 그 것이 정확히 반복되고 있는 듯한 묘한 기분 이었다. 아마도 그 것은 같은 종류의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 이었으리라. 내일부터 마주하게될 낯선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6월2일 월요일, 입대하는 날 아침이 되었다.

입맛이 좋지는 않았지만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을 성의있게 비우고 아버지에게 하직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는 3년전에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거동이 불편하시고 의사표현도 힘드신 상태 였지만 나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고 애를 쓰셨다.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지만 나는 아버지가 내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강단 있으신 어머니 역시 형 셋을 군대에 보내 보았고 이번이 네번째 이지만 막내아들을 보내는 것이 쉽지는 않으신 모양이다. 서로에게 어려운 시간을 줄이려 빠르고 간단하게 인사를 마무리하고 집을 나서는데 가슴 안쪽으로 저릿한 무엇이 지나가는 듯 하였다.

입대영장에 기재된 집결지 광운공대(현, 광운대)는 서울의 남서쪽인 우리집이 있는 봉천동에서 대각선 방향인 북동쪽 끝에 있었다. 전철 2호선이 개통되기 전이었으니 아마도 청량리역 까지 버스를 타고가서 1호선 전철을 타고 성북역(현, 광운대역)으로 갔던것 같다. 

 

 

중학교 동창 몇몇이 배웅해 주겠다고 성북역에 와 있었다. 친구들과 같이 역사를 나와 광운공대로 이어지는 멀지 않은 길을 걸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며 모두 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입대자와 그의 가족들, 떠들석 하게 허풍을 떠는 친구들 그리고 이따금 눈물을 글썽이는 아가씨도 보였다. 이별의 장소로 향하는 길을 같이 걷는 사람들, 이별을 위한 동행이라...... 
  
운동장에는 이미 상당한 인원이 모여 있었고 내 뒤에도 속속 도착하는 사람들을 보니 입대 인원이 거의 천여명 가까이 되어 보였다. 그런데 모여있는 입대자들이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모두들 하루이틀 사이에 긴급하게 영장을 받았다고 한다. 어떤이는 영장은 커녕 어제 저녁에 전화로 통지 받고 왔다고 황당해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머리도 깎지 못하고 당시 유행하던 장발머리를 그대로  달고온 입대자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나중에 알게되었다. 그 날의 입대자가 왜 그리 갑자기 모아졌는지.

1980년 5월엔 전국이 각종 시위로 어수선 하였고 특히 광주사태라 불리던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한 호남지방은 모든 교통이 두절되어 고립된 상태였다. 논산의 육군훈련소에 5월말 입소가 예정되었던 목포장정이 집결하려면 여러지방에서 목포로 모여야 했지만 그곳으로 이동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으므로 훈련소에 공백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 빈자리를 징병을 연기하였다가 입대를 위해 휴학중인 서울거주 대학생으로 긴급히 메웠던 것이었다. 잠재적인 시위가담자인 휴학생들을 일거에 사회에서 분리 시킬 좋은 기회였으니 정권의 입장에선 일석이조의 아이디어 였으리라.     

 

 

입대자들이 도착하는대로 줄을 세우고는 명단확인과 인원점검을 반복해서 하던 군인들이 때가 되었는지 대열 주변을 정리하며 따라온 환송인들을 분리시켰다. 잠시후 인솔자를 따라서 줄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잘다녀오라는 마지막 인사 소리가 웅성거림으로 들려왔다. 나도 친구들과 간단히 눈인사를 하고 움직이는 줄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행열은 성북역으로 향했고 기차 선로에는 군용열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호송병의 지시에따라 차례로 객차에 올라 순서대로 앞쪽 부터 채워나가며 좌석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았다. 건너편 선로에는 출발 대기중인 1호선 전철이 보이고 플랫폼엔 몇명의 사람들이 전철을 타려고 움직이고 있었다. 나에게는 특별한 날이지만 그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하루일 뿐이리라.   

객차마다 담당 호송병이 있었는데 우리 객차에는 다행히 인상이 좋아보이는 상병이 우리를 맞이하였다. 우리 객차가 만석이 된걸 확인한 호송병이 우리에게 열차 이동중의 주의사항을 친절히 알려주었다. 그리고 잠시후, 덜컹~ 열차가 움직이려 몸짓을 하며 소리를 내었다. 그 때까지 혹시나 하고 기대하였던 영화 '바보들의 행진' 마지막 장면은 아무에게도 일어나지 않았다.

 

움직이는 기차에서 영자에게 몸을 내밀어 키스하는 병태

 

논산을 향하여 열차는 출발하였고 호송병은 창문의 가림막을 내리도록 지시하였다. 모든 창문이 가림막으로 가려진채 달리는 기차. 우리는 이제 온전히 사회로 부터 격리되었다. 호송병의 표정과 말투가 달라졌으며 우리는 '이제 군대에 왔구나'하는 것을 싸~한 기운으로 느끼게 되었다.
 
낭만의 시간은 뒤에 남기고 현실의 시간으로 들어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