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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의 기억

손더스 중사

by 센티멘탈 쟈니 2020. 8. 14.

우리동네 골목끝 막다른 곳에 대문을 둔 집이 둘 있었다. 막다른 정면엔 꽤 큰 철제 대문을 가진 커다란 집이 있고 그 왼쪽 옆으로 측면에 자그마한 나무 대문을 가진 소박한 크기의 집이 있었는데 그 집에 나보다 두살 아래의 명호라는 이름의 남자아이가 살았다.

상세한 이야기는 모르지만 엄마는 안계셨고 아빠는 군인이라 지방으로 전전하였기에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집에선 그 집을 '명호네' 혹은 '명호할머니네'로 불렀다.

우리 어머니가 골목에서 가장 친하게 왕래하며 지내는 집이기도 하고 나나 명호나 골목에 또래의 사내아이가 없어서 두살이라는 큰(?)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쪽집에서 같이 놀기를 권장하여 서로 심심치 않게 왕래하던 집이었다.

그 명호네 집에서 티비를 들여 놓은 것이 내가 초등2학년쯤 이었으니 1966년 이었을 것이다. 골목에 다른 몇몇 집에도 이미 티비가 있었으나 우리가 구경갈 정도로 편한 집들이 아니어서 아쉬워하고 있던 참이었기에 마치 우리집에 티비가 들어온 듯한 기대감에 들떴던 것 같다.

그 때부터 거의 매일 저녁 밥숟갈을 놓자마자 명호네 집으로 달려갔다. 명호할머니도 매번 반겨주셨기에 소심한 나도 별 부담 없이 그 집에 드나들며 밤 9시~10시까지도 눌러 앉아 티비를 볼 수 있었다.

 

도망자 & 0011 나폴레옹솔로

 

주로 미국 드라마를 더빙하여 방영하던 당시에 '도망자' 와 '0011 나폴레옹솔로' 등 재미 있는 프로가 여렀 있었는데 단연 최고는 '전투' 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라고 할 수 있지만 최소한 남자 아이들에게서의 인기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전투'는 2차대전중 유럽전장에서 분대단위의 미군이 독일군을 무찌르는 소규모 전투를 주제로 한 드라마 이다. 주인공은 분대장인 손더스 중사 였는데 그는 인간적이며 합리적이고, 용감하면서 정도 많고, 임무는 항상 성공하면서도 겸손하다.

위험에는 앞장서고 필요할 때는 단호하니 부하들은 이견 없이 그의 말에 따른다. 적이라고해서 무작정 해하지도 않으며 전쟁의 피해자인 주민들에게도 친절하다. 게다가 그는 항상 옳았다.

그뿐 아니라 심지어 그의 분대원들도 모두 좋은 사람들 이다. 물론 미국에서 만든 드라마 이니까 당연히 미국은 선이고 독일은 악으로 표현된다. 매번 전투마다 독일군은 피해가 막심해도 미군은 경미한 피해만 입는다.

'전투'의 손더스 중사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우리를 결정적으로 도와주었고 식량을 포함한 많은 물자를 지속적으로 지원해 주고 있으므로 미국에 호감을 갖는 것이 당연한 국민의 도리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특별히 그렇게 배운적도 없었는데....

당시엔 의정부나 동두천 뿐만 아니라 서울 시내의 거리에서도 심심치 않게 미군을 마주칠 수 있었는데 하나같이 멋지고 무엇이든 풍부하며 여유있어 보이는 것이 키도 작고 가난한 우리와는 급이 다른 사람으로 여겨졌다.

게다가 '전투' 같은 드라마나 영화는 '미국사람=좋은사람'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좋은사람은 당연히 우리편이어야 하니 '미국사람=우리편' 이라는 공식을 받아들이도록 은연중에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30년이 훨씬 지나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에서 손더스 중사와 흡사한 캐릭터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톰 행크스가 연기한 존 밀러 대위 이다. 두 캐릭터는 많이 닮았다. 심지어 사용하는 무기도 톰슨 기관단총으로 같았다. 두 캐릭터가 주는 이미지는 전쟁속의 '좋은사람' 이고 관객들은 그 '좋은사람'이 우리편 이라는데 안도감을 느낀다.

'좋은사람'도 우리를 같은편으로 생각하는지, 반대편에는 '좋은사람'이 없는 것인지를 생각해볼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었던 것 같다. 요즘의 젊은이들에겐 그 여유가 생긴듯 하여 뿌듯한 마음이 든다.

 

1968년 우리집에 티비와 전화가 들어왔다

 

2년 정도 명호네 신세를 지고나니 드디어 우리집에도 티비가 생겼다. 당시 최신유행인 미제 제니스 14인치 였다.

비슷한 시기에 전화도 놓았는데 전화는 신청후 2~3년을 기다린 후에 차례가 돌아온 것이라 집안의 경사라 아니할 수 없었다.

너무 기뻐서 기념촬영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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