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70805

소보로 엄마는 새벽에 일어나신다. 여덟 식구의 아침식사와 네 개의 도시락을 준비해야 했기에 엄마는 눈을 뜨자마자 바쁘게 움직이신다. 고등학생, 중학생, 국민학생인 형들과 누나들, 그리고 아버지에게 집에서 나서는 순서대로 아침상을 준비해 주시고는 학교가는 형들과 큰 누나에게 도시락을 하나씩 들려 주셨다. 세명의 형과 두명의 누나가 등교하고 아버지도 출근 하시고 나면 집안이 갑자기 조용해 진다. 엄마와 나, 평화롭게 아침식사를 한다. 엄마는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후의 고요함을 조용한 식사를 하면서 즐기시는 것 같다. 식구들이 저질러(?) 놓은 일거리가 쌓여 있고 그 것들을 곧바로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의 여유를 누리시는 듯 하다. 내가 밥을 다 먹고도 엄마는 한참을 더 드신다. 천천히 아주.. 2020. 7. 24.
삼선교 어느 동네나 다리가 하나씩 있다. 그리고 동네의 아이들은 모두 그 다리 밑에서 줏어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나에게는 우리동네에서 가장 큰 다리인 삼선교가 바로 그 다리 였다. 삼선교는 북악산 서쪽에서 발원하여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성북천에 만들어진 다리들 중 하나인데 혜화동에서 돈암동을 거쳐 미아리 고개로 이어지는 전차길 대로를 연결하는 큰 다리 였다. 지금은 지하철 4호선 한성대 입구역이 나의 기억속의 삼선교 바로 그 자리에 있다. "다리 밑에서 줏어왔어" 내가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에게는 큰 충격 이었다. 형들은 놀리느라 내게 그렇게 말했겠지만 부모님도 부정하지 않고 웃고만 계셧기에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대략 내가 네살이나 다섯살 정도 였을 때의 일이니 형들.. 2020. 7. 20.
성북동(1958~1969) 삼선교에서 지금은 복개된 성북천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좌측으로 파출소가 있다. 파출소를 예각으로 끼고 돌아 몇 집 거리쯤을 가면 작은 사거리가 나온다. 삼선교 큰길에서 오는 소로가 좌측에 있고 경신중고등학교 쪽으로 연결되는 언덕길이 우측에 있다. 우리집은 그 언덕길 따라 중간쯤 오르다 왼 쪽으로 난 골목 안에 있다. 물론 지금은 남의 집 이지만 나의 기억 속에는 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유년기를 보낸 우리집 이다. 기역자로 꺽이는 골목의 꺽인 정면에 우리집 대문이 있다. 우리집 대문을 앞에서 바라다보면서 오른쪽 꺽인 모서리 위치에 대문을 내고 그 안 쪽으로 또 하나의 대문을 가진 경희네가 우측에 있었다. 경희네 대문 옆으로는 쌍둥이네의 한옥식 대문이 우리집과 직각으로 위치해 있었다. 왼 쪽에는 우리 집과 담장.. 2020. 7. 15.
우리 식구 우리식구 I 나에겐 형이 셋 있다. 셋이나 있었지만 나와 같이 놀지 않았다. 각각 십오년, 십삼년 그리고 십일년의 나이 차이 때문 이다. 네다섯살 경으로 생각되는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에도 이미 큰 형은 대학생이었고 작은 형들은 고등학생 이었다. 누나는 둘인데 오년과 삼년 터울이라서 상대가 되기는 하였으나 같이 어울리기 보다는 다툴 때가 많았다. 특히 작은 누나는 자기가 오빠들이나 막내에 비하여 차별을 받는다고 자주 불평을 하였는데 효과는 커녕 오히려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어머니에게 혼나기가 일수였다. 물론 그 막내는 나를 지칭하는 것 이었다. 셋째 형과 큰 누나 사이에 누나가 한 명 더 있었다는데 625 때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명을 달리했다고 들었다. 그 외에도 집안에서 유일하게 서울살이를 하던 우.. 2020. 7.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