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7080이라 불리우는 우리는 1970~80년대에 20대 시절을 보냈다. 따라서 1950년대와 60년대생을 우리라고 할 수 있지만 꼭 그렇게 한정지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나이가 조금 많거나 적은 것은 문제가 아니며 그 시절의 정서에 공감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우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어린시절은 가난했다. 학창시절은 검정색 교복에 갇히어 엄격한 틀 속에서 보냈고, 청년기는 민주화의 격동 속에서 피해자 혹은 가해자의 편에 서게 되기도 하였다. 모두가 앞으로 달려가는 고도성장기엔 떠밀리듯 따라 뛰다보니 어느새 중년이 되어 있었다.
이제 우리도 잘살게 되어 대부분이 중산층이라고 자부할 때 IMF를 맞았다. 그 어두운 터널을 힘들게 헤쳐나올 때 2002 월드컵이 개최되어 전국민과 함께하는 응원 속에서 모처럼 속시원히 소리치며 남몰래 울고 싶은 마음을 달래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몸소 겪어낸 아버지 세대에 비하면 고생이라 할 것도 없고 저성장 시대의 아들 세대가 겪는 고충에 비해 우리의 청춘이 더 아팠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우리도 충분히 힘들었기에 지나온 낭만의 시절을 되뇌이며 추억하며 위로 받을 자격은 된다고 생각한다.
이제 아이들은 자라서 어른이 되었고 그동안 많이 지친 우리는 준비 안된 노후를 걱정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매일 매일이 새로워지는 시대에 낙오되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으나 자신도 모르게 남발하게 되는 '라떼' 때문에 이미 '꼰대'라 불리운다.
나
1958년 봄에 서울 성북동에서 평범한 가정의 막내로 태어났다. 소심하고 내성적이며 조용하고 감성적인 아이 였으며 앞에 나서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여 눈에 안띄는 자리에 있어야 편안해 하는 그런 아이 였다.
신동이 아님은 비교적 일찍 깨우쳤으며 그래도 중상 정도의 성적은 유지 하였는데 예체능을 포함해 어떤 과목에도 특별히 재미를 느끼지는 못하였다. 단지 외우는 쪽 보다는 이해하는 쪽을 편해 하였기에 이과를 선택하는데 망설임은 없었다.
어디에도 어긋나지 않는 생활을 하려 노력하지만 사회정의를 실현키 위해 나서거나 행동하는 만큼의 용기는 없었고 단지 마음으로 응원하는 소시민에 지나지 않는다. 용감한 이들의 희생으로 이루어 놓은 세상에 무임승차한 것임을 자책하며 항상 미안함을 느끼고 있다.
평범하게 가정을 이루고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풍족하게 해주지는 못했지만 험한 고생을 시키지는 않은 것에 그래도 가장으로서 기본은 하였다고 만족해 하는 그런 보통사람 이다.
나의 기억
오래 전부터 예전의 기억들이 시나브로 떠올라 잠시잠시 추억에 잠기곤 했다. 그것이 즐거웠던 것이든 힘들었던 것이든 기억이 익으면 추억이 되나보다. '추억'이라는 단어가 주는 센티멘탈함은 나이가 들어 갈수록 그 시절을 점점 더 그리움으로 바라보게 하는것 같다.
몇 해 전부터 이렇게 떠오르는 기억들을 글로 적어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떠오른 기억을 잡기위해 틈틈히 메모를 해가며 조만간 글쓰기에 착수해야 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막상 하려고 하니 시작하는 것이 너무너무 힘들어 차일피일 미루기만 해오다 이제서야 나의 바램이 웬만큼 숙성되었는지 간신히 첫 글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글을 쓰려고 이것저것 찾아보고 준비하다보니 내가 100% 확실하다고 생각해오던 기억에서 뜻밖의 오류가 발견되는 경우가 적지 않음을 알게되었다. 아마도 서로 다른 기억들이 서로 섞이기도 하고, 생각이 기억으로 변형되기도 하고 그러는 모양이다. 가능한 줄이려고 하겠지만 부분적으로 기억의 오류에 의해 객관적 사실과 다르게 표현될 수 있음에 미리 양해를 구한다.
자! 이제 우리의 그 때, 낭만이 있었던 그 기억의 시간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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